그 시절 집에는 고물 비디오 플레이어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스테레오(!)가 있었다.
2000년 겨울쯤이었나,
할머니가 사다 주신 비디오 하나는
꼬맹이의 온 정신을 가져갔고,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수십, 수백 번을 돌려보았더란다.
꼬맹이 하나의 세상을 바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장난감
영화 초반, 우디는 타고난 리더인 것처럼 그려진다.
마을 청년 회장마냥 공지 사항을 전파하는 모습에
00년도 어린 글쓴이는
‘아 저놈이 여기 짱이구나’ 라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인다.
근데 이 자식, 그릇이 심상치 않게 작다.
최신형 장난감 버즈가 등장하자
장난감들은 엄청난 관심을 가진다.
우디는 관심을 독차지하는 버즈가 영 맘에 안든다.
와중에 공룡 장난감 렉스의 한마디.
오와, 네가 공룡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장난감들은 경쟁자의 등장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디도 마찬가지,
스위스 칼보다 많은 기능을 가진 버즈에게 부들부들.옆에서 우디를 까내리는 장난감들도 한몫한다.
나쁜 새끼들
영화는 불과 15분 만에 장난감 생태계는 물론,
그들의 심리 상태까지 전달한다.
관객은 이미 장난감 사회의 관찰자 자리에 착석한 셈이다.

우디와 버즈
두 주인공은 쉬지 않고 투탁거린다.
우주 놀이에 반쯤 미친 버즈가 영 아니꼬운 우디.
결국 질투로 인해 일이 벌어지고,
앤디네 옆집 악마아이 시드의 집에 갇힌 둘.
어떻게든 살아서 앤디에게 돌아가야 하는 우디에게는
분명한 두 가지 과제가 있다.
첫 번째는 버즈.
시드네 집에서 본인이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멘탈이 쪼개져 버렸다.
두 번째는 자신.
장난감 무리들 사이에 신뢰를 잃어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두 과제를 전부 해결하지 못한 우디는
폭죽에 묶인 버즈에게 마음속 진심을 털어놓는다.

앤디가 너 같이 멋있는 장난감을 두고 나랑 놀기나 하겠어?
그 폭죽에는 내가 묶였어야 해.
짧은 시간 동안 인간적인(아니, 장난감적인?)
성장을 이루어낸 우디.
버즈를 친구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항상 본인이 주인공일 필요도,
일인자일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배운다.
어른이 만든 어린이 영화
1편이 담고 있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우디와 버즈가 친구가 되는 과정이다.
우디가 성장을 통해 버즈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상황을 헤쳐나가는 모습은
우디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장난감 사회의 진정한 리더로서 정당성을 부여한다.
버즈의 성장도 인상 깊다.
장난감인 본인을 받아들이고
우주 전사가 아니라도 괜찮다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
삶의 균형을 찾게 된다.

우디는 끊임없이 실수하는 인물이다.
짜증 날 정도로.
그럼에도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그를 빛나게 한다.
현실의 우리는 수도 없는 잘못을 경험하고,
치기 어린 행동에 실수를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지금도.
나이가 들면 그런 사실을 까먹고 살아간다.
실수를 하면 안 되는 사회를 살아가서 그런가,
어느샌가 바보짓을 삼가고
실수와 먼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할 뿐이다.
진정한 성장의 순간은
감정과 실수의 수렁에서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세상에 있는 모든 어린이 영화는 어른이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그렇게 느껴진 적이 없다.
fin.
Hi, this is a comment.
To get started with moderating, editing, and deleting comments, please visit the Comments screen in the dashboard.
Commenter avatars come from Gravatar.